발화의 힘
발화 · 대화
ㅈ의 집에서 보기로 했다. ㅈ이 사는 곳은 부자 동네다. 버스를 타면 40분이면 도착하는데, 그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무언가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게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언젠가 이동진 평론가가 ‘아비투스’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저에게 가장 중요했던 10대 시절에서 20대 초반까지 제가 워낙 없이 살아서, 지금도 어떤 장소에 가면 계급적인 위축감 같은 것을 느끼거든요. 제가 와인을 안 먹어봤겠어요, 이제는? 꽤 많이 먹어봤을 거 아니에요. 와인 바에 가서 ‘와인이 맛있네’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저와 그 장소를 분리하는 어떤 굉장한 괴리감을 느껴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의 취향이 개인의 배경과 자라온 환경, 가치관, 분위기, 종교, 사상, 권력, 계층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아마 내가 ㅈ의 동네에 갈 때마다 내가 느끼는 그 무언가는 내가 자라온 환경과 나의 가치관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행동 역시 어쩌면 나를 둘러싼 여러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고.
ㅈ은 7월에도 봤었다. 그때는 노량진에 있는 곱창집이었는데, 그때에도 내 이야기를 할 기회는 있었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고. 혹시나 관련된 주제가 오르내렸으면 모르겠지만 딱히 그러지도 않았고, 먼저 얘기하기엔 여전히 나의 본새가 변하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마음을 먹었다. 먼저 내가 이야기를 하기로.
육회와 육개장을 사이에 두고 소주 한 병을 나누어 마셨다. 오랜만에 들어가는 소주다. 뜨끈한 육개장에 더 뜨끈한 흰 쌀밥을 말아 먹었다. 육회보다 국물이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소주를 꺼냈다. 이때부터 나는 소주를, ㅈ은 맥주를 마셨다.
ㅈ의 아들내미가 바닥에 쉬야를 해버렸다. 쉬야 사건 전에는 반짝이 풀을 입에 넣기도 했다. 그때마다 ㅈ은 아가를 혼냈고, 그 쪼매난 녀석은 으앙 울어버렸다. 울고 있는 아기에게 말했다. 그래 언제 또 그렇게 네 감정을 오롯이 담아 울어보겠니, 하고. 내 마음을 담아서 발화하는 게 중요하단다. 아기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꼬맹이의 울음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그리고 나의 발화가 시작되었다. ㅈ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겠다며 나의 지난 8년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ㅈ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이야기가 ‘과거형’이라는 걸 더 놀라워했다. 힘들었겠다며 위로의 말도 전해주었다.
그냥 속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이제는 하고 싶었다고 말하면 되었을 텐데. 굳이 ‘가능한 사랑’ 이야기를 꺼내며 원래라면 말 안 했을 거라고 합리화하는 나의 모습이 별로였다. 뒤늦게 곰곰이 생각해보니 별로였던 것도 아니다. 그걸 말하는 순간에 들었던 감정이다. 참 구리다 구려.
숨겨둔 아픔을 먼저 꺼내놨기 때문일까. ㅈ도 자신이 담고 있었던 고민과 아픔을 꺼냈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나의 비밀을 얘기한다는 건 어쩌면 거래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적인 거래라기보다는, 뭔가 의리와 신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주고받음이랄까.
그렇게 8년의 이야기는 처음으로 내 입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의 귀로 들어갔다. 이 발화가 어떤 힘을 가질지는 잘 모르겠다. 발화를 한 순간에도 그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렇고. 다만 그런 생각은 들었다. 내 입을 떠나는 순간 그 이야기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이 발화의 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한강을 따라 집까지 걸어왔다. 2시간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