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가능한 사랑 : 우리는 누구에게 마음을 여는가

영화 · 이창동

이름 없는 대화

ㅎ : 가능한 사랑 봣니

내일 볼 예정이란다

ㅎ : 즐감하렴

재밌게 봤니

ㅎ : 응, 영화같은 영화를 봤어. 쉽고 명료해서 좋았어. 아 그리고 bgm이 명품이란다.

요즘 영화를 열심히 보는 구나. 아주 바람직하다.

ㅎ: 응 오늘도 보러가고 싶은데, 이제 볼 게 없네

(…)

ㅎ: 어땠니

참 좋은 영화더구나. 전체적인 톤 자체가 잔잔하고 고요한데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대단한 거 같아. 생각할 거리도 많은 것 같고.

예전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ㅎ이 최근 부쩍 영화에 열심이다. 나도 적지 않은 시간을 영화에 쏟고 있는데, 그래서 개봉 영화를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 서로 추천도 해주고 말이다.

ㅎ은 이 영화가 쉽고 명료해서 좋았다고 했다.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면서도 살짝 고개가 기웃해졌다. 나에게 ’가능한 사랑’은 무언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인상을 주었다기 보다는 계속해서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느끼는 슬픔과 아픔, 그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영화 ‘가능한 사랑’에서 호석(설경구)은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성격의 인물이다. 태생부터 남들 앞에서 뚝딱거리는 성격인 데다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겪은 경험이 있다 보니 더 날카로워질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미옥(전도연)과 철(정섶)이에게까지 마냥 무뚝뚝하진 않다. 사랑하는 미옥에게는 그 둘 사이에 맞춰진 온도의 대화와 행동이 존재하니까.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석이 미옥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호석이 갖고 있는 슬픔과 아픔들. 혹여나 그것을 드러냈을 때 미옥이 더 걱정할까 봐, 아들 철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될까 봐, 가족들이 그런 자신을 염려할까 봐 말이다.

그런 마음을 호석은 다큐멘터리 감독인 예지(조여정)에게는 다 털어놓는다. 호석이 예지와 깊은 관계를 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 앞으로 영상으로, 다큐멘터리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호석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뱉어낸다.

내가 짊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 진심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 걸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걸까? 아니면 들어줄 사람이면 되는 걸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그 누구에게도 잘 열지 않는다. 결국은 나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에. 혹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고백하더라도 그다음이 또 부담이 되곤 했다. 내 아픔과 슬픔을 열심히 들어준 사람들은 열이면 열 진심을 다해 위로해주고, 공감해준다. 나아가 대안까지 제안해 주기도 하지. 하지만 그러면 그건 나에게 또 다른 짐이 된다. 그 대안을 택하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지니까.

그래서 나는 문을 닫고 벽의 두께를 더 키워왔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런 나의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보듬어 주었으니까. 때로는 특별한 고민에 대해선 슬쩍 마음의 문을 열어두기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경험했던 슬픔과 아픔이 스스로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능한 사랑’의 이창동 감독은 1985년에 교통사고로 5살 난 아들을 잃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했고, 같이 울어주던 사람도 있었지만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느끼진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때 한 학부형이 찾아와서 ‘우린 같은 배를 탔군요’라고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 학부형도 이창동 감독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었고.

이창동 감독이 당시 느꼈던 고통을 어떻게 내가 감히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 고통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어쩌면 이렇게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된다면, 그 앞에서는 내가 먼저 무릎을 꿇고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창동 감독이 느꼈던 것처럼, 이 극한의 고통을 열어 둔들 어느 누가 공감해줄까 싶기도 하다. 슬픔과 아픔의 규모가 작으면 작은 대로, 또 크면 큰 대로 아픔을 공유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나에게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마음이 꽉 막힌 답답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누군가는 자신이 힘들었던 감정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쏟아내기도 한다. ㅇ도 그랬다. 물론 그것이 ㅇ의 감정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 일 가운데, 호석처럼 혹여 내가 걱정할 만한 내용들은 쏟아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ㅇ이 나에게 털어놓은 것들의 대부분은 업무 스트레스였다.

나는 항상 ㅇ에게 고민하는 모든 것들을 쏟아내달라고 말했다. 사소한 것부터 내밀한 것까지 모든 것들을.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면서. 나 말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면서.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쏟아내는 이야기 가운데 업무 얘기가 가득 차 있다보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일 이야기가 아니라, ㅇ이 고민하는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는데,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ㅇ은 자신의 진짜 슬픔과 아픔은 누구에게 열어주는 걸까?

영화를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는 여태껏 그렇게 생각해왔다. 사소한 게 아닌 진짜 힘듦을 고백해야만 그 사람을 진짜 믿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아니었다. 호석은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털어놓았던 예지를 미옥보다 더 사랑했던 걸까? 아니다. 털어놓을 수 있는 게 있고, 털어 놓을 수 없는 게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선택지는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일 테고. 그런데 나는 ㅇ이 매일매일 나에게 고백해주던 업무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으려 했다. 우리 이야기에 더 집중해 보자고 했다.

자기개방

심리학에는 ‘자기개방(self-disclosure)’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단순히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원래라면 알 수 없을 나에 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자기개방에는 크게 두 차원이 있다. 폭(Breadth)과 깊이(Depth). 폭은 얼마나 다양한 영역을 이야기하는가를 말한다. 깊이는 얼마나 개인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공개하는지를 말하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 오늘 먹은 음식, 주말 계획처럼 여러 일상의 영역을 두루 이야기한다면 자기개방의 폭이 넓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사실 누가 나한테 화를 내면 나는 굉장히 무서워. 어릴 때 경험인 것 같아”라고 말한다면 깊은 자기개방으로 볼 수 있을 테고. 폭과 깊이 외에도 자기개방을 이해하는 차원은 많다. 얼마나 자주 드러내는지를 나타내는 빈도(Frequency), 그 안에 감정이 얼마나 담기는지를 나타내는 감정성(Emotionality), 그 감정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나타내는 방향성(Valence) 등.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낯선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얕은 개방을, 반면 친한 사람에게는 깊은 개방을 할 거라고 예상하게 된다. 평균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예외가 있다. 깊은 관계, 중요한 관계에서는 자기개방의 ‘비용’이 커진다는 것. 가까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단순히 정보 전달로 그치지 않고, ‘나를 걱정하진 않을까’라는 예상이 붙게 된다는 거다. 관계가 안전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거지. 마치 처음 본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는 쉽게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처럼 말이다.

사소한 행위를 공유한다는 것은 자기개방의 차원 중에 폭과 빈도를 키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 일상에 상대방을 포함시키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거고. 반면 내밀한 것을 공유하는 자기개방은 깊이를 키우는 과정일 수 있겠다. 나는 심리적인 친밀성을 기대하며 깊이를 키우고 싶어 했던 반면, ㅇ은 생활의 친밀성을 더 강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차원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로를 자신의 세계로 포함시키고 싶었던 거였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