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개운해지기 좋은 날

일기

일찍 눈이 떠졌다. 새벽 3시 혹은 4시. 아침잠이 없어진 걸까. 혹은 어제 일찍 잠에 들어서일까. 오늘은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이걸 하려고 지난주에 한바탕 소비를 했던 거니까. 짐을 정리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

어차피 일찍 눈이 떠진 이상, 계획을 세웠다. 7시부터 분리수거를 할 수 있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일단 씻으면서 화장실 청소를 해야지. 화장실에 있는 쓸모없는 것들을 모아서 버려야지. 옷장에 있는 처리해야 할 옷가지들도 함께 우르르 버려야지. 책상 곳곳에 있는 녀석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또 책들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까. 거실에 두어야 하나, 내 방에 두어야 하나. 음, 거실에 두어야겠다. 덕분에 거실 스피커 장도 깨끗하게 청소해야겠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7시가 되었다. 이런 거 보면 내가 P가 맞나 싶다.

일단 옷장부터 열었다. 한쪽 서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녀석들. 커다란 비닐을 가져다 녀석들을 한꺼번에 담았다. 아뿔싸, 너무 많아서 다 담기지를 않는다. 하긴 계절과 안팎을 가리지 않고 많은 녀석들이 있으니 그럴 만하다. 일단 담을 수 있는 녀석들은 다 넣고 나머지는 들고 가야겠다. 한 보따리 들고 1층으로 내려가 분리수거장 한편에 있는 의류 수거함에 넣었다. 이미 세탁은 되어 있는 상태이고, 옷의 상태도 나쁘지 않으니 문득 누군가가 입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청소가 한참 남았지만, 아침밥부터 먹어야겠다. 배가 고픈 것도 있었지만 약을 챙겨 먹어야 하니까! 호다닥 밥을 챙겨 먹고 다음 목표는 화장실로 정했다. 씻고 화장실 청소하고 영화를 보러 가야지. 화장실 안에 있는 용품들을 바깥으로 싹 빼냈다. 버려야 할 것들도 정리했다.

청소를 위해 구매한 무기를 드디어 선보일 시간. 홈스타 핑크파워를 한 손에 쥐고 구석구석 뿌려줬다. 핑크파워가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10분 정도 기다렸다. 이번엔 바이칸의 시간이다. 기다란 바이칸 바닥 솔로 바닥 곳곳을 닦아주었다. 자루 솔로는 찌든 물때가 있는 선반을 집중 공략했다. 그렇게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한 오, 나의 화장실.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이제는 영화관에 가야 할 시간. 국회 앞에서 버스를 타면 금방이다. 영화는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 무얼 볼지 엄청 고민을 많이 했다. 처음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배리 린든’을 예매했다가 아 역시나 시대극이 크게 당기질 않아 취소했다. 다음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예매했다가 시간이 애매해서 이 역시도 취소.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눈에 들어온 ‘파리, 텍사스’.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에 대한 기억이 너무 좋아서 설렘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예매한 친구다.

창밖의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광화문. 영화관에 도착해 표를 수령하고, 포스터를 받고, 3층으로 올라가 의자에 앉아 상영관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내 좌석은 A1. 2층의 상영관에서는 A1이 나쁘지 않아서, 동일한 좌석으로 예매했던 건데 3층은 조금은 불편했다. 다음엔 가운데로 해야지, 라는 생각과 함께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영화가. 아마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분명 눈물을 줄줄 흘렸을 것이다. 이 영화 이야기는 따로 해야겠다.

혹시 다른 포스터로 교체할 수 있을까요?

낮 버전을 수령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밤 버전이 더 끌렸기 때문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굿즈는 교환이 어려우세요.

다시 보니 역시 낮 버전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 포스터를 들고 여운을 곱씹으며 다시 집으로 귀환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는 사람들이 가득이었다. 포스터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면 부끄러우니까 안 보이는 방향으로 들어야지. 바람이 많이 분 탓에 포스터가 여기저기로 나부꼈다. 강하게 잡으면 구겨질 것 같고, 또 약하게 잡으면 바람에 구겨질 것 같아 노심초사했다. 영화관을 더 자주 가게 될 것 같은데 포스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액자를 더 사야 하나, 아니면 포스터를 담아둘 통을 마련해야 하나. 집에 도착하고 포스터부터 갈아 끼웠다. 그전까지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이제 뒤로 물러날 시간이다. 이제 다시 청소를 재개해야지.

그다음은 책상 위의 녀석들이다. 이미지는 버리고 텍스트는 남겨두었다. 책들이 문제다. 내 책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책도 많다. 책은 죄가 없다. 언젠가 볼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은 버리지 않고 함께 정리하기로 했다. 스피커 장 2층이 너희들의 새 공간이란다. 먼지를 싹 닦아 깨끗해진 집에 책들을 이사시켰다. 한 줄을 꽉 채워두었는데도 침실과 내 방에 쌓여있는 책들이 아직 한가득이다. 이 친구들의 집은 어디가 될지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다.

하루가 길었다. 이제 쉬어야지 하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체중계가 나를 째려본다. 그래 알았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번 주 러닝을 안 하긴 했어. 여의도 한 바퀴 천천히 걸어야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뛰다 보니 속도가 붙었다. 음 그러면 3km는 열심히 뛰고, 3km는 헛둘헛둘 뛰고, 나머지 3km는 다시 열심히 뛰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많은 사람을 마주쳤다. 한 바퀴를 돌았으니, 다시 마주친 사람들도 있었겠지. 하지만 제대로 기억나질 않는다. 저분, 아까 봤던 분이었나? 싶은 사람들이 한 5~6명 정도 있었다. 여의도 한 바퀴를 돌고 털레털레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개운했다.

짐 정리를 일부러 미룬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마무리하니 오히려 개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