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서로의 중력이 닿지 않는 곳

편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오늘도 5시에 눈을 뜨고 휴대폰을 만지며 뒹굴뒹굴. 그러다가 〈피의 게임 X〉를 보려 웨이브를 틀었던 게 아침 7시 반이었다. 내 침대 머리맡에는 빔 프로젝터가 우뚝 솟아 있다. 내가 자취를 시작한 직후에 구매해서 쓰고 있으니, 이 친구도 꽤 오래되었다.

‘아이 참 재미가 없네.’ 하고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가 있는 책상 위에는 편지 하나가 놓여 있다. 어제 내 우편물 보관함에 꽂혀 있던 편지다. 처음이다. 그 공간에 편지가 있었던 건. 그 전에는 굳이 거기에 둘 필요가 없었으니까.

빔 프로젝터보다 오래된 인연의 ㅇ이 보낸 편지다. 어젯밤에 이미 편지를 읽었던 터라 감정이 크게 동요되진 않았다. 다시금 편지를 꺼내 보면서 ‘참 나쁜 사람이네.’라는 마음이 또다시 불쑥불쑥 올라왔다. 동시에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을까’하는 마음도. 다만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을 알게 되어서 오히려 후련한 마음도 있었다.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 다시금 답글을 작성해서 보냈다. 어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시간도 흘렀고, 사실관계도 처음보다는 충분히 파악된 터라 내 딴에는 이성을 찾고, 냉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참으로 감성의 힘은 세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냉정의 탈을 쓴 열정이 다시금 나를 지배했다.

그 열정의 힘 때문일까? 오늘 점심은 엽떡을 먹고 싶었다. 문래점에 주문해야지 싶어서 배달 앱을 켰는데 아직 문래점은 준비 중이다. 다른 지점은 10시 반, 11시부터 이미 문을 열었던 터라 다른 곳에서 주문 할까 했다가 참았다. 나는 냉정한 사람이니까. 12시가 되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40분 뒤 따끈따끈한 엽떡 초보맛이 도착했고, 허겁지겁 먹었다. 편지와 ㅇ의 흔적이 가득 차 있는 컴퓨터 책상 위에서.

탄수화물이 든든하게 내 뱃속을 채워줬으니, 이제는 낮잠 시간. 빗방울이 보일러 연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따금 들리는 게 참 좋다. 더 크게 듣고 싶어서 유튜브로 〈비오는 날 시골 아궁이 장작〉 영상을 틀어 놓았다. 솔솔 잠이 왔다. 일어나 있으면 비가 그칠 거야.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5시. 아직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곧 있으면 그칠 것 같아 보였다. 비가 그치면 여의도를 뛸 계획이었다. 천천히, 빠르지 않게 하지만 오랫동안. 다행히 비는 그쳤고,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모자도 쓰고 나갔다. 9분에서 10분 페이스로 여의도 반 바퀴를 뛸 계획이다. 아주 천천히, 빠르지 않게 하지만 오랫동안. 그러면 내 혼란스러운 마음도 천천히 정리되지 않을까 싶어서.

아니었다. 여전히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마음속에서 여전히 이성과 감성이, 냉정과 열정이 부닥치고 있다. 그런데 자꾸 감성이, 열정이 이기는 형국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내가 더 큰 아픔을 떠안았으니, 내가 더 힘든 만큼 나를 보듬어 줘야 하는 게 맞다. 오죽하면 ㅇ이 자신의 편지에 담긴 글을 두고 스스로 ’거북한 것’이라 표현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ㅇ에게 준 아픔과 ㅇ의 아픔이 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직 내 그것의 유통기한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다시금 생각해 봐도 감성의 힘은 너무도 세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녀석이기에 예상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왔던 거겠지.

어느새 여의도 반 바퀴를 돌았다. 이제는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복귀할 시간. 집을 나서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달리기 코스처럼, 한동안 우리의 궤적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ㅇ과의 인연은 이미 마무리되었다. ㅇ은 나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나 역시 ㅇ의 중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졌다. 이제 서로의 궤적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자연의 많은 것들이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가 있듯, 우리의 궤적도 언젠가 다시 겹칠 수도 있다. 그 동안 우리는 각자의 우주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수많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리 끌리고, 저리 튕겨 나갈 것이다. 그러다 먼 훗날 언젠가 다시 서로의 중력장에 닿을 수도 있겠지. 언제일지는 모른다.